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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의 눈, 그녀들의 속삭임에 시선을 돌려주다 





   김영옥 (여성학자, 이미지 비평가)    

     


1. 재장면화와 카메라의 응시


사진은 빛이 새긴 흔적이다. 카메라가 새기는 흔적으로서의 이미지는 오래 전부터 다양한 스토리텔링 역할을 해왔다. 김진희가 만들어낸 사진이미지들은 기록사진도 아니고 철저한 연출사진도 아니다. 그렇다고 잠복해서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다 포획한 순간의 미학도 아니다. 굳이 영역을 가르자면 연출사진이겠지만 여기서 미장센이나 프레임의 기획은 카메라를 든 김진희에게 달렸다기보다는 그때 그 장면으로 되돌아가 몸에 스며있는 웅얼거림을 드러내고, 눅눅한 물기를 말리고 싶은 그녀들에게 달렸다.
연애가 프로젝트가 되고 스펙이 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성의 성적 경험은 여전히 몽환과 환멸 사이에서 흔들린다. 열정적 사랑의 위험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길 때 그녀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많은 경우 어긋남과 미끄러짐으로서의 섹슈얼리티 기억이다. 그것이 열정이라 부를 수 있는 에너지의 강도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호기심의 차원에서 일어났다 해도 ‘그때 그일’은 시작도 과정도 끝도 명확하지 않은 미완의 이야기로 남아 ‘어딘가’에서 떠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깐 든 낮잠에서처럼 묘한 잔상으로 떠도는.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할 바로 그 장면에서 그녀들은 정작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다. ‘그때 그 장면으로 되돌아간다면 내 성의 이야기는 어떻게 다시 그려질 수 있을까?’ 궁금하다. 그래서 이제 그녀들은 시간여행을 떠나려한다.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가 그날 그때 안타깝게 사라지던 자신을 다시 만나고자 한다. 그때의 이야기를, 그녀가 들려주고 싶어 했던 그 속삭임들을, 채 발화하지 못했던 중얼거림을 들어주려 한다. 카메라를 든 김진희가 그녀의 이 시간여행을 동반한다. 미세한 물방울들처럼 솟아나는 속삭임에 따스하고 연한 빛을 비춰준다. 사랑의 행위 후 그녀들에게 남아 있던 말 없는 어떤 시선, 그 잔여에 빛이 가 닿는다. 그렇게 우리는 그녀들의 몸에 채 새겨지지 않은, 혹은 거칠게 새겨진 이야기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김진희의 카메라는 그녀들이 행했으나 명확히 자기 것으로 경험했다고 말하기 힘든 느낌이나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 크게 ‘열린다’. 사진의 매체 혁명적 성격을 누구보다도 먼저 강조했던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카메라의 눈은 시선을 되돌려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누군가 당신을 응시할 때 그 시선을 느낀 당신은 스스로도 그/녀에게 시선을 되돌려줌으로써 그 시선에 응답한다. 그러나 경험이 빈곤해지고 들려줄 이야기가 사라지는 시대에 시선은 더 이상 돌려주기 위해 거기 있지 않다. 덤불 속에 몸을 숨긴 채 희생제물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맹수의 번들거리는 눈. 카메라의 눈이 바로 이러한 눈이고, 경험이 점차 불가능해지는 시대 사람들의 눈 또한 이러한 포획자의 눈을 닮아간다. 카메라가, 시선을 주고받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의 가장 친근하고 확실한 동반자가 된 것은 그래서 어쩌면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김진희의 카메라는 그러나 시선을 돌려주려한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가능한 활짝 열린 카메라의 눈은 그녀들의 몸에 남아 있는 미진함과 안타까움, 당혹스러움과 불편함, 설렘과 안도, 실망과 의혹의 미세한 흔적들에 살가운 시선을 보낸다. 이 카메라의 눈과 함께, 이 눈의 동반에 힘입어 그녀들은 자신의 몸에 남아 있던 저 흔적들을 응시한다. 김진희의 사진들에서 ‘그때 그 장면’의 자기를 만나고 있는 여성들의 시선과 카메라의 시선은 서로 길항하지 않는다. 그의 사진들을 감싸고 도는 저 부드러운 위로의 기운은 카메라의 눈도 시선을 돌려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역설적이게도 눈이기 보다는 오히려 귀가 되고자 할 때,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불가능을 너머서,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2. 연애가 프로젝트가 되고 스펙이 되는 시대, 성/차(sexuality/gender difference)의 자리

“가공될 수도, 타협될 수도, 극복될 수도, 초월될 수도, 가려질 수도, 승화될 수도 없는 인간 개개 인의 원천에 바로 성의 차이가 있다” (키냐르, 『은밀한 생』)

후기 근대에 들어서면서 성(sexuality), 사랑(love), 연애(dating) 그리고 결혼은 이전에 당연시 되던 필연적 연결고리에서 벗어나 조금씩 독립적인 영역이 되고 있다. 이 네 영역 간의 관계는 다양한 시대적 상황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적ㆍ관념적 삶을 지배해왔다. 이제는 거의 ‘외설스럽게’ 들리는 ‘혼전 순결’ 혹은 ‘순결 이데올로기’라는 용어가 가리키듯이 이 영역들의 연관성은 사회적으로 강제된 것이지만 문제는 연관성 자체에 있다기보다 연관성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 있다. 사랑과 결혼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근대의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는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개인의 내면세계에 응답하는, 그래서 세속적 삶의 무의미함과 우연성을 넘어서 개인을 완성시켜 줄 ‘필연적 반려’를 발견하고자 했다. 여기서 결혼과 아이는 사랑의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적지 않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지적했듯이 결혼은 사랑, 특히 열정적 사랑의 (적어도 ‘타락’이 아니라면) 불편한 ‘타협’이기도 하다. 결혼은 사랑의 위험을 관리하는 사회화된 방식 아니던가. 그렇다면 성과 사랑의 관계는 어떤가? 이 관계 역시 늘 논란에 휩싸인다.
‘성관계(sexual relationship)는 없다’라는 명제를 통해 라캉은 성적 쾌락이 진정한 사랑과 무관함을 강조했다. 이 관점을 채택하는 사람들은 그러니 유일하게 의미 있는 성적 쾌락에 탐닉해라, 라고 제안하거나 또는, 성적 쾌락과 무관한 진정한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랑에서 인간 실존의 최대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무엇보다도 벌거벗음의 상태와 관련된다. 벌거벗은 몸은 그토록 자연스럽고 수치스러우며 비사회적인 어떤 근원을 가리키지 않는가. 욕망이 쾌락적 탐닉이기 이전에 벌거벗음이라면 그것의 본래 의미는 절대적 타자, 의미 있는 타자(significant other)와의 만남이고 공존이다. 벌거벗은 두 사람이 등장하는 무대, 이 무대에서 삶은 다시 새롭게 발명된다(알렝 바디우). 많은 경우 그러하듯이 무대 위의 두 연행자가 (performer) 각기 다른 성에 속할 때 서로가 직면하는 타자성은 더욱 극단적이고 연행은 그만큼 더 많은 용기와 창의력과 담대함을 요구한다. 성차(gender difference)는 여성이 여성성과, 남성이 남성성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너무나 본질적인 것으로 연결되어 온 그 문화적 역사만큼 두 성 사이에 깊은 심연을 새긴다. 성에 대한 철학적ㆍ미학적 이론이나 문화담론이 그토록 무성함에도, 자기 몸의 결정권을 둘러싼 여성들의 투쟁이 그토록 지난한 노정을 거쳐 왔음에도 여전히 ‘성적 주체’라는 기표는 많은 여성에게 선언이거나, 지구상에서는 마땅한 번역어를 찾기 힘든 다른 별의 언어다. 후기 근대 사회의 (특히 신자유주의와 지구/지역화가 가져온) 다양한 구조적 변화 속에서 성, 사랑, 연애, 결혼은 이전보다는 훨씬 느슨한 관계 속에 있지만 그러나 ‘각본’ 자체가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사랑의 각본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성적 욕망’이다. 성적으로 욕망하고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랑을 증명하는 가장 명확한 징표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그녀의’, ‘그녀에게’ 성경험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질문하기는 종종 생략된다. 각본이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것들, 세부사항들, 미묘한 얼룩들, 각본에 포함시키기 애매한 것들은 누락된다. 김진희의 카메라는 각본대로 연행했지만(perform), 모든 것이 각본대로는 아니었음을, 각본과 다른 무엇이 자기 안에 남아 자꾸 목젖을 간지럽히고 있음을, 미미한 배탈처럼 등을 구부리게 만들고 있음을 느끼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다시 한 번 해보라고 권한다. 재연(re-performance). 그러나 이 재연은 이미 했던 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 재연은 오히려 이것을 통해 비로소 그날의 장면을 온전히 장면이게 만드는, 다시 말해 그녀를 그 장면의 온전한 등장인물로, 주체로 만드는 행위다.
여성은 언제 성적 주체가 되는가? 주체임을 선언할 때? 성적 행위를 할 때? 하기 전에 욕망하고 고민하고 계획할 때? 하고 나서 되새김질을 할 때?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시간을 두고 그 장면(scene)을 거듭 재연하면서 성적 주체가 될 것이다. 김진희가 이 사진들을 ‘속삭임/속삭이기(whisper/ing)'라고 부르는 것은 사진적 효과와 이야기의 차원 둘 다를 가리킨다. 이 사진들은 자연광을 사용해 담백하면서도 아름다운 사진적 아우라를 빚어낼 뿐 아니라 ’그녀들‘의 이야기를 위한 자율적인 응시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은 더 이상 욕망 드라마의 각본이 제시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수행하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그녀, 드라마의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 그녀를 보여준다. 이미지는 통상 남성 시각 주체에 의해, 남성 시각 주체를 위해 만들어지고 유통되어 왔다. 그리고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구조상 관음증이나 페티시즘 혹은 나르시시즘에 빠져들기 쉽다. 그동안 얼마나 자주 여성들은 남성 사진작가들의 (특히 여성) 이미지들 앞에서 불편한 소외를 느껴왔던가. 그러나 김진희의 사진들은 (특히 남성주체의) 시각적 쾌락에 기여하지 않는다. 이 사진들에서 우리는 관음증으로도 나르시시즘으로도 미끄러지지 않는 어떤 시선을 만난다. 카메라의 눈이 시선을 돌려주고 있는 그녀들은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보는 여성은 그녀 자신의 즉자적 거울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3. 오래된 미래: 시선을 주고 되돌려 받는 능력과 ‘성관계’

두 사람이 등장하는 무대 위에서 새로운 삶이 발명되는 것이라지만, 이 삶은 하나가 아닌 둘의 관점에서 구성되는 것이라지만, 이미지의 성(gender-sexuality) 정치학이 여전히 남성의 페티시즘과 관음증, 그리고 나르시시즘을 재/생산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사진적 시도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제된, 그래서 왜곡된 ’둘‘의 관점보다 더 공평하고 새로운, 충분히 공감적인 ’하나‘의 관점이다. 통상 그 둘이 성차를 전제로 한 둘이기에 이 사진이 제시하는 이미지들은 무엇보다 여성 친화적이다. 시선을 되돌려주지 못한다는 카메라의 눈이지만, 포획을 위한 잠복이 아니라 공감을 위한 듣기를 자청하자 카메라의 눈도 어쩌면 시선을 돌려줄 수도 있음을 이 사진들은 암시한다. 이 사진들을 탐욕 없이 바라보면서 우리는 시선을 주고 또 되돌려 받는 능력을 떠올린다. 오래 된 미래에 속하는 이 능력으로 우리는 ’성관계는 있다‘고 평화롭게 말할 수 있는 날을 앞당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